대상: 80대 초반의 할아버지

증세: 지난 3년 동안에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아오고 있었다. 신경 정신과에서는 약물만 처방해 주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마음 속에 평생동안 묻어두고 억압해 온 감정들을 방출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다 2년 전에 불면증까지 첨가되어 내과 의사가 처방해 준 수면제를 정각에 먹지 않으면 수면제를 복용을 해도 밤에 잠을 편안하게 잘 수가 없었다.

접촉: 치료자에게 1년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 40대의 아드님의 권유로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음.

진단: 우울증, 불면증

치료 기간: 아드님의 도움으로 6개월 간 치료 계약을 하고 1주일에 2회씩 (1회기에 2시간씩 1주일에 4시간) 치료 회기로 심리치료를 받게 됨

치료 결과: 아래의 치료 과정은 할아버지가 치료를 시작한지 4시간의 치료에서 드러난 할아버지의 문제점들을 분석한 것이다.

 

치료의 과정:

 할아버지는 올해 81세로 외형적인 모습 즉 신체적으로는 몸이 연약해 보였으나 내면 심리적으로 마음은 아주 강인 했다. 보통 나이가 60대로 넘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 노년인데 심리치료는 무슨? 사치스럽게 심리치료를 받겠는가! 심리치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기억도 희미해지고 이 나이에 심리치료를 받아서 돈만 낭비하는 것 이외에는 무슨 효과를 얻겠는가?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되지 심리치료를 받아서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들을 하기 쉽다.

 그러나 치료자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할아버지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요즈음의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치료자와 의사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시간에 치료를 받고 나서 두 번째 치료 회기 시간에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은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 심리 검사를 할 줄 알았는데 심리검사 같은 것을 하지 않고 바로 그냥 서로 이야기만 주고 받아서 치료를 해 나가는 것이 특이 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치료자가 기록이나 중요한 것을 노트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한 내용들이 다 기억이 되는지 궁금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치료자를 깜짝놀라게 했다. 할아버지는 치료자의 주변을 둘러 보면서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들을 둘러 보면서 어떤 책들을 치료자가 읽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치료자가 "우리나라 책들이 아니고 전부 영어로 된 책들입니다."라고 말을 하자 깜짝 놀라면서 전부 영어로 된 책들이 군요! 라고 하면서 책꽂이 꽃인 책들에 호기심을 보일 정도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치료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과거의 자신이 살아온 과거 역사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했다. 치료 첫 시간에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90% 정도 이야기를 하고 치료자가 이야기를 한 것은 약 10% 정도였다. 그는 심리치료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치료 시간에 오면서 치료 시간 10분 전에 도착을 했고 그의 손에는 조선일보 신문을 들고 왔었다. 즉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책들을 읽었고 특별히 그가 6.25사변 직전에 평양 체신 전문 대학에 다닐 때 그 시절에 문학 서적들 특히 카프카, 까뮤, 케이르키에골, 실존 주의, 싸르트르 등을 읽었던 시절을 회상을 하면서 그 작가들을 자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이미 그의 아드님의 치료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고로 딸들이 모두 국문과를 전공을 선택했고 지금은 외 손녀들이 모두 국문학의 전공하고 있다고 그의 아드님이 귀뜸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세상 돌아가는 정치적인 문제, 시사 문제들에 관심이 많았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인텔리전트 한 할아버지" "지식적인 유식한 할아버지"였고 대화에서 "소통이 잘 되는 할아버지"였다.

 그는 3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를 했다. 신경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전으로 우울증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나 효과가 없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불면증이 첨가 되어 밤에는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다고 호소를 했다. 약물 처방을 받으러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할아버지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해야지 그냥 약만 드시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기억을 하시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3년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밤에 수면제를 정각에 제 시간에 복용하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중년의 아들이 심리치료를 받고 우울증이 호전해서 다시 6개월을 더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에 할아버지 자신도 심리 치료를 받아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호소를 했다. 40대 중반의 아드님의 치료를 상세하고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할아버지는 그 자신의 문제는 그의 부인과의 갈등에서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을 했다. 부인과는 서로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서 결혼 초반기부터 부인인 할머니와 많이 다투면서 살아 왔고 지금은 방을 같이 사용하지 않고(할아버지 할머니는 각자 서로 다른 방을 사용)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아들 내외가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자와 손녀들이 어린 시절에는 그들을 할머니가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치료를 받고 있는 아드님의 가장 큰 불평중에 하나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과 딸의 어린 유아기 시절에 맞벌이를 하는 그들을 외면했다고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자녀들을 돌볼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해서 자녀들만 돌보게 하여 2년 정도 같이 생활을 하면서 가족처럼 생활을 해 오다가 어느 날 크다란 사건이 발생했다고 회상을 했다.  평소에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부인과의 대화 단절로 대화의 상대를 찾고 있다가 그 아주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친절하고 손자, 손녀들을 잘 돌보아주었기 때문에 시간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부인인 할머니가 알고 있었고 특별히 그날 그 아주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아침 마다에 커피를 한 컵씩 타서 주는 것을 보고 질투를 해서 그 아주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입에 담지 못한 욕을 퍼부어서 그 아주머니를 쫓아낸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는 그 자신의 우울증의 원인의 55% 정도는 할머니와 갈등에서 온 것일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할머니의 폭언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는 며느리가 있는 면전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심한 욕설로 언어 폭력을 했다고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을 했다. 그의 고향은 북한의 평안남도 xxx 로 그가 평양 체신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6.25 사변이 터졌고 그는 북한군에 징집이 되었고 포병 부대에서 말단 사병으로 근무를 했는데 유엔군이 북상을 하면서 그의 포병 부대가 비행기의 포격으로 전멸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면서 부대를 탈출해서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을 했고 항해도 구월산에 들어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을 괴릴라 작전으로 괴롭히는 유격대를 조직해서 북한군과 싸우고 있었고 할아버지도 그 사람들에 합류해서 북한 군과 싸웠다고 했다. 그는 낮에는 북한군 복장으로 마을에 내려 와서 식량과 부식을 얻어서 생계를 이어갔고 밤에는 북한군을 괴롭히는 유격대의 일원으로 활약을 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남한으로 내려 올 것을 결심하고 몇몇 동료들과 밤에 남한으로 탈출을 시도 했고 바다물이 빠지는 썰물의 틈을 타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갯벌을 건너서 필사의 탈출을 시작했고 다행히도 인근에 국군 부대에 발견되어 귀순을 했으나 이들이 북한군 포로병으로 이첩을 하는 바람에 귀순 용사가 북한군으로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 억울한 사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는 마침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로 몇 년간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기억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했다.

 그는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다시 국군에 입대를 해서 생활을 하던 군대 생활이 그의 일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이 해결이 되었고 인근에 주둔을 했던 미군들의 도움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던 시절이 걱정 근심이 없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 시점에서 "군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는 상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군에서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와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던 고통스런 이야기들을 술술 거침없이 이어나갔다.

 결혼 후에 한 때 한강 유역에서 모래와 자갈을 끌어 모아서 건설회사에 파는 모래 운반선의 사업이 잘 되어 한 때는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닌 적도 있었으나 당국의 금지로 그 사업을 포기하고 베트남과 이란에서 파견 근로자로 해외해서 몇 년간 일을 한 것들을 이야기를 했다. 이란에서 한국인들 노동자들을 관리를 하는 직책을 맡아서 일이 순조롭게 풀리어가던 시점에서 팔레비 이란 왕이 축출되고 호메니 정권이 들어서면서 탈출의 길이 막혀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어제의 이야기처럼 술술 털어 놓았다.

 그 이후에 별다른 기술이 없던 할아버지는 4명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썼던 어려운 시절들을 이야기를 했다. 그는 택시 운전을 해서 힘들 게 살았던 시절을 이야기를 했다. 그 시점에서 막내인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xxx 근처에 실향민 동료들과 낚시를 갔었고 같이 데리고 갔던 막내 아들이 지뢰를 밟아서 발목을 절단 당한 그 사건에서 목이 메였다. 그는 평생동안 아들에게 죄인으로 살아오면서 "미만하다"는 말도 제대로 한번 못해 오다가 최근에 막내 아들과 의사 소통이 되면서 비로소 평생동안 마음 속에 담아 놓았던 그 죄의식을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고통스러워 했다.

 그는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을 한시 라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의 막내로 위로는 형님과 누나 그리고 둘 째 형님과 둘 째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로 6.25 이후에 그들과 헤워진 이후로는 그들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평생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살아 왔다고 했다. 특별히 둘 째 형님은 일제 시대 일본으로 밀항을 해서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에 막내 동생이던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해서 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 형님을 회상을 했다. 둘 째 형님은 일찍 집을 떠나서 혼자서 일본으로 드나들었고 이후에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 1학년을 끝내고 일본인들의 징병으로 끌려가던 것을 기억을 했다. 둘 째 형님은 징병으로 끌려서 만주로 간다는 소식을 남긴 체 그 이후에는 그와의 만남은 없었고 이후에 집으로 배달된 그의 편지에서 그는 일본군에서 탈출해서 중국의 군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해방 후에 북한 공산주의의 철처한 멤버가 되어서 6.25 때 소령으로 북한 군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고 이후에 유엔군의 북진으로 공산주의에서 해방되었다가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밀려 내러가면서 그의 가족이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서 공산주의 세력들에 의해서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할 위기에서 형님이 골수 공산 당원으로 있다는 중국군이 보낸 편지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회상을 했다. 둘 째 형님은 골수 공산당원으로써 북한의 군대에서 연대장을 한다는 말을 6.25 사변 때 형님을 만났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의 형님은 그가 북한 군의 징집을 피해서 숨이 지내는 시점에서 그에게 온 형님의 편지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했다. "---네가 평양 체신 전문학교에 대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너는 공산당에 가입을 해서 인민 해방군에 들어가서 통신병으로써 너의 전문 기술을 인민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려고 하느냐!--"라는 질책적인 편지를 받았던 것을 회상을 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치하에서 6.25 사변 이전에 생활을 해 본 경험으로 공산주의가 빈곤과 가난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간파한 사람으로 철처한 반공 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동시에 그의 형님은 철처한 골수의 공산주의가 되어 있어서 한 가정에서 비극의 산 증인으로 보였다. 미군이 밀고 들어와서 자유 주의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미군을 환영하지 못했고 공산주의가 다시 밀고 들어왔을 때 공산주의를 환영하지 못하고 내색을 하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을 했다. 어머니는 철처한 골수 공산주의자인 둘 째 아들과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막내 아들 때문에 어느 쪽에도 환영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면서 그는 가슴 아파 했다. 그가 인민군에 징집되어 붙잡혀 집을 떠나는 날에 아버지에게 "저는 내일 인민군에 징집되어 내일 아침에 집을 떠납니다"라고 아버지에게 말을 했던 때를 회상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그를 데리려 온 징집관을 보고 어머니가 통곡으로 왜 아침에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로 아버지를 원망하며 통곡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털어 놓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떠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한그릇을 먹여 보내지 못한 한스러움을 울며서 통곡으로 가슴 아파했던 그 어머니의 마음을 할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수 없이 이야기를 했고 가족들은 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듣는 것을 싫어 했다. 특별히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한 맺힌 이야기들을 듣는데 질려서 그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막아 버리고 아예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아드님을 치료 하면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제 노년으로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마음 속에 묻어둔 상실의 아픔들을 애도를 하는 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치료자는 알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그의 마지막 삶의 짊들을 내려 놓고 마음을 정리를 하고 그리고 남아 있는 삶을 즐겁게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면 할아버지의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지고 만년에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상처를 닦아 내고 수리를 하는 과정이 앞으로 남은 할아버지의 심리치료라는 것을 치료자가 예견을 했다.

 할아버지는 처음의 2시간의 치료 회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의미 심상한 말을 했다. "내 아들의 우울증이 선생님의 치료로 많이 회복이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의 우울증도 그리고 불면증도 해결할 수 있겠다고 믿음이 가게 된 것도 심리치료를 받으러 온 이유 중에 하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내 아들과 지금까지 의사 소통이 되지 않고 막혔던 관계를 뚫어줄 의사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게 된 것입니다." 라는 말로써 치료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치료자는 할아버지가 젊은 전문학교 시절에 읽었던 수 많은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공산주의 보다는 자유 민주주의가 더 좋다는 것을 감지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공산주의의 초반기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는 것을 감지살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 세월이 반 세기가 흘러가면서 공산주의는 몰락을 했고 북한은 먹고 사는 식량 문제로 굶어 죽어가는 빈곤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만약에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쯤은 먹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배고픔 속에서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월남을 해서 수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살와 왔지만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건 탈출은 그 만한 대가를 얻을 수가 있었다. 비록 그가 살아온 삶은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혈혈 단신으로 일가 친척이나 형제들이 한 사람도 없는 빈손으로 몸뚱이 하나만 믿고 남한으로 넘어온 할아버지에게는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야기를 하면서도 비록 그가 사업에서 성공을 한 적도 한 때는 있었으나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온 한 평생에서 그가 그대로 자랑스럽게 내 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끝까지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 내 가족을 기켰다는 자부심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그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읽을 수 있었다. 6.25사변 직후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잘 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시점에서 힘들 게 살아 오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할아버지의 삶은 분명히 성공한 삶이었다고 그 자신도 가족들로 인정을 할 때 그가 평생 동안 어깨에 걸치고 있는 삶의 짊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임을 치료자는 직감을 했다.

할아버지가 한 치료 회기에서 "선생님 이제 죽음 다가오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떻게 해야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치료자에게 했다. 치료자는 할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치료 과정을 예고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다음의 치료 회기는 치료 10시간 째의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치료 과정입니다.  다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