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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mourning)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건강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상처받은 자아가 수리되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애도의 과정이 수리되어 상실한 대상을 포기하고 건강한 다른 대상을 찾아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상처에서 빠져 나오게 되면 건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것을 애도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수리되지 못하고 상처가 그대로 남아서 상실한 대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상의 상실을 부인하며 고통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애도가 병적으로 변한 것으로 심한 우울증(멜랑꼴리아, melancholia)이 여기에 속한다.

 심한 우울증은 20세기 초반까지는 멜랑꼴리아(melancholia)라고 불러왔으나 20세기 후반기에 심한 우울증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지금은 멜랑꼴리아라는 말은 정신증적 우울증에서 세부적 분류 단계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조증심한 우울증에 대한 반대행동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우울증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 조증이다. 조울증은 우울증과 조증이 교대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우울증의 기간이 조증의 기간 보다 긴 것이 특징이고 반드시 규칙적인 것은 아니다(Ogden, 2005).

 

 우울증과 조증이 내면의 마음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느냐 하는 것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프로이드(Freud)이다. 프로이드(Freud)는 1900년에 "꿈의 해석"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정신분석학의 창설자로  1914년-1915년에 2년 동안에 무려 12편의 논문을 썼고 이 중에 "본능의 흥망성쇠", "억압", "무의식"의 3개는 1915년에 출판을 했고 1917년에 두 편의 논문인 "꿈 이론에 대한 큰 심리학"과 "애도와 멜랑꼴리아"를 출판했으나 나머지 7편은 폐기하고 말았다. 이 논문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이 과학적인 학문으로써 단단한 토대 위해서 서게 되었다고 정신분석학자들은 말하고 있다(Ogden, 2005).

 그 중에서 대표적인 논문이 "애도와 멜랑꼴리아(Mourning and melancholia)라는 논문으로 이 논문이 정신분석학에서 내면 대상관계 이론에 기초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Ogden, 2005). 애도와 멜랑꼴리아에서 처음으로 프로이드가 내면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우울증의 심리적 과정을 단계적으로 묘사한 설명은 그가 죽은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설명한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내면의 마음 속에서 심한 우울증과 조증과 애도에 대한 설명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비록 그의 우울증 이론에 수많은 학자들이 부가적인 연구로 설명을 더붙이기는 했지만 지금도 명쾌한 이론적 걸작으로 남아 있다.

 프로이드(Freud)는 "애도와 멜랑꼴리아" 라는 논문에서 애도와 멜랑꼴리아(심한 우울증)를 대상의 상실에 따른 반응행동으로 보았다. 즉 사랑하는 연인을 상실, 혹은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상실이나 친척이나 친구의 상실, 혹은 애지중지하는 동물이나 물건의 상실, 애완동물의 상실,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귀중품, 소중한 물건의 상실 혹은 무형의 소중한 가치 즉 희망, 가치관, 목표의 상실 등을 겪었을 때 상실에 따른 심리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반응 행동으로 애도와 멜랑꼴리아가 유사하다고 설명을 한다. "심각하게 고통스러운 거부, 외부 세계에 대한 흥미의 중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활동의 억제, 그리고 자아와 관계된 느낌이 낮아진다, 자아 비난의 수준까지 내려간다, 자아 비방과 처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가 최고조에 이른다"(Ogden, 2005).

 쉽게 말하면 "소금에 절여놓은 파김치"와 같다. 소금에 절여 놓기 전에는 싱싱하고 생기가 넘치는 파와 김치가 소금에 저려놓으면 생기가 없고 축 늘어져서 에너지의 고갈에 따른 활동의 상실에다 행동으로는 두문불출하게 된다. 즉 움직이거나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잠만 잔다. 에너지의 고갈에 움직이기 조차 싫어한다. 심지어 먹는 것조차 싫어진다. 무기력, 무가치, 무능력을 한탄만 한다. 여기까지는 애도와 멜랑꼴리아가 같다고 프로이드는 설명을 한다.

 그러나 애도와 멜랑꼴리아의 차이점은 애도는 외부 세계가 공허한 반면에 멜랑꼴리아는 내면의 세계가 공허한 것이 차이점이라고 프로이드(Freud)는 강조한다. 애도에서는 텅 빈 세계가 있다, 세상이 텅 비고 초라하고 빈약한 세상이 있다. 외부 세계가 텅 비고 초라하지만 내면의 세계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멜랑꼴리아에서는 텅 비고 초라한 자아가 있다, 자아(ego)가 무가치 하고 어떤 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다, 자아(ego)가 어떤 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대변한다. 자아(ego)를 욕한다, 자아(ego)가 상처 받기를, 내동댕이쳐 던져지기를 기대한다, 자기 자신(self)를 비하시키고 낮춘다, 어떤 사람과 연결된 것에 대해서 무가치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사람과 자기 자신과 관계를 불쌍하게 여긴다. 멜랑꼴리아에서 어떻게 내면의 세계가 변해가는가를 설명한 프로이드의 명쾌한 이론적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Ogden, 2005).

 

첫 단계: 멜랑꼴리아에서는 자아 즉  ego가 쪼개진다. 출생 직후 어린이는 자아(self) 즉 "나"가 없다. 엄마의 자아(self)가 내 자아(self)가 된다. 쉽게 말해서 엄마와 아기가 하나가 된다. 이것을 정신분석에서는 self-object 즉 "너와 나의 하나된 관계"라고 부른다. 이 단계에서는 아기는 엄마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낀다. 엄마의 마음이 아기의 마음이 된다. 고로 전지전능한 것이 특징이다. 힘에서 전지전능하고 지식에서 모르는 것이 없는 전지전능한 만능으로 느껴진다. 아기에게 엄마는 이 우주의 중심인 전지전능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기가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엄마의 유방, 젖꼭지이다. 아기의 최초의 환경은 엄마의 유방인 젖꼭지에서 시작한다. 조금씩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부분적으로 인식하게되고 이것이 엄마라는 전체로 확대되어간다. 엄마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쯤이 출생 후 7개월-10개월 정도 되는 기간으로 이 시기를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는 시기로 "낯가림"이라고 부른다. 이 때부터 엄마의 얼굴 모습이 머리 속에 이미지로 새겨진다. 이후부터 엄마와 나는 분리된 사람으로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임을 알 게 된다. 걸음마를 하면서 아기는 나와 엄마는 다른 사람임을 인식하게 된다. 즉 "내" "나"라는 이미지가 생겨난다. 자아 이미지가 형성된다. 자아 이미지인 "나"(self)와 엄마 이미지인 "너" "대상"(object)라는 이미지가 생기고 그 개념이 마음 속에 생겨난다.

 정리를 해 보자, 외부에 대표되는 "나"(self)라는 이미지 속에는 기능적인 "나"를 대신하는 자아 즉 ego가 있다. 이 ego 속에는 나인 내 이미지와 엄마를 대표하는 너라는 자아 이미지 즉 대상(object)가 있다. 너와 나와 통합되어져서 ego가 된다. 너 이미지와 나 이미지가 통합되어져서 ego라는 기능적 자아가 된다. 여기에서 대상의 상실이 오게 되면 내 마음에서 너라는 이미지(object)가 상실된다. 외부의 실제 대상의 상실은 애도에서는 내 마음 속의 자아(ego)에 상실이 없는데, 외부의 실제 대상의 상실한 있는데 비해서 멜랑꼴리아에서는 내면의 마음 속에 새겨진 대상 이미지의 상실이 따라온다는 뜻이다.

 고로 자아는 통합되어진 것에서 쪼개져 버린다. ego가 쪼개져 버리기 때문에 힘이 약해진다. 즉 자신감이 약해진다. 초라하고 텅 빈 자아가 된다. 무기력, 무가치, 무능력으로 느껴진다. 자신감이 약화되어 다른 사람과 관계를 피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 ego의 일부의 에너지가 퇴행해서 출생 직후의 너와 나의 하나된 단계로 철수해 버린다. 여기에서 상실한 대상은 엄마를 상징한다. 고로 ego의 힘이 약화되고 나르시즘적인 에너지는 증가한다.

 엄마와 아기의 하나된 단계로 철수해 버리기 때문에 현실에서 상실한 대상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유는 내 마음 속에 영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실한 대상을 보내지 않고 마음 속에서 살아있게 한다. 고로 상실에 대한 고통은 영속적으로 지속이 되고 고통과 괴로움은 계속 마음 속에서 남게 된다.

 건강한 상실의 애도에서는 처음에는 상실한 대상을 애통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라진 대상에 대해서는 포기를 하고 새로운 대상을 만나고 새로운 대상이 상실한 대상을 대신해서 잊어 버리고 새로운 즐거움이 대체된다.

 그러나 멜랑꼴리아에서는 상실한 대상은 마음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보내고 포기할 필요가 없어진다. 내 마음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멜랑꼴리아에 빠지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출생 직후에 엄마와 아기의 하나된 단계에서 취약점이 생긴 것이다. 고로 너와 나의 분리와 개인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 취약점이 남아 있다가 어른이 되어서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취약점이 재 가동이 되어서 심한 우울증인 멜랑꼴리아로 나타난 것이다.

사례: 심한 우울증으로 심리치료를 받은 한 중년 여자분의 경우에 그녀는 결혼을 했으나 자녀를 가지지 않기로 결심을 했고 남편은 자녀를 원하지만 그녀는 결혼 할 때 자녀를 가지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한 상태였다. 지금은 남편과 별거중이었고 남편은 반대를 하고 있으나 이혼을 고려중이었다. 거주지도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 전에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있었으나 그 연인과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 연인과는 결혼을 하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의 이름을 xxx로 하자고 약속도 했고 만약 전쟁이 나면 혹시 헤어지게되면 새해 첫날 xxx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다. 그녀는 첫 사랑과 사랑의 증표로써 늘 손에 쥐고 장난감처럼 주물렀던 호두(옛날에는 호두 두 개를 손에 쥐고 딱딱 소리를 내면서 가지고 다녔음) 두 개를 서로 한 개씩 사랑의 증표로써 나누었다. 이후에 어떤 사연으로 서로 해어지고 나서 그녀는 지금도 그 호두를 설합 속에 보관하고 있고 한번씩 외로우면 그 호두를 꺼내서 보고 있었다. 남편과 결혼 후에 그녀는 첫 사랑의 연인을 자주 꿈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결혼 첫 2년 동안에는 한 달에 몇 번씩 헤어진 연인의 꿈을 꾸었다. 세월이 흘러서 중년이 된 지금도 가끔 한번씩 첫 사랑의 연인의 꿈을 꾼다고 했다.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후에도 그녀는 첫 사랑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첫 연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간절히 알아보고 싶어하지만 감히 전화는 하지 못하고 전화 번호부를 뒤적거리면서 혹시 첫 연인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 있나? 해서 찾고 있다. 그녀는 첫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실한 연인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로 우울증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헤어진 연인을 자신의 잘못이 크다는 이유로 평생동안 자기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질책하면서 우울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전문인으로 살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연인을 상실한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삶에서 즐거움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녀 생산이 끝나가는 늙어가는 자신을 학대하고 처벌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더 상세한 것은 다음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세 번째 단계: 쪼개진 일부 ego는 나르시즘으로 흘러가고 그 나머지 일부는 초자아로 연결된다. 애도와 멜랑꼴리아라는 논문을 쓸 당시에는 프로이드는 초자아(superego)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초자아라는 용어는 1920년 후에 마음의 구조 이론이 나오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프로이드는 그 이전에 마음의 구조 이론을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있었다. 애도와 멜랑꼴리아 논문에서 초자아라는 말을 등장하지 않았으나 마음 속에 검열관, 처벌자로써 사용하고 있었다. 초자아는 부모님의 처벌, 금기, 금지가 초자아가 된다.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쪼개진 ego의 일부가 초자아에 붙여서 ego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 비난, 자아 비판이 되고 심하게 되면 자아 처벌, 자아 학대, 자해, 자상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자아의 살해인 자살로 이어진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울증 환자들이 제일 많다. 우울증에서 회복을 보이는 단계 즉 ego에 에너지 고갈에서 에너지 회복으로 가는 단계에서 자살이 많다. 이것은 ego에 에너지가 고갈되면 자살할 생각도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멜랑꼴리아는 실제로 상실한 대상의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상실한 대상이 병이나 사고로 급사한 경우에는 대상이 건강 관리를 잘못해서 혹은 음주나 부주의 하게 행동해서 사고가 난 것을 멜랑꼴리아는 자신이 평소에 그 대상을 미워했기 때문에 자신이 불효를 했기 때문에, 자기 잘못으로 대상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메랑꼴리아의 자아 비난은 사실은 그 대상에 대한 비난이 자아 한데로 흘러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 사랑했어야 할 사람에 가야할 비난이 자기 자신한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드(Freud)는 논문에서 "멜랑꼴리아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비난은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공격이 자기 자신의 자아 한데로 방향이 바뀌어 흘러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멜랑꼴리아는 그들 자신의 무가치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모욕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관찰에서 온 것이다. "항상 마치 부당하게 취급을 받았다는 것처럼 보인다.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었다는 인상을 보인다"고 프로이드는 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멜랑꼴리아는 자신에 실망을 준 대상에게 분노와 미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Ogden, 2005).

 좀더 전문적인 말로써 표현하면 특수한 대상에게 애착으로 붙는 것은 한 때는 멜랑꼴리아 한데서도 존재를 했었다. 그 다음에 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가볍게 무시당하거나 실망 때문에 대상관계가 산산 조각이 난 것이다. 그 결과는 이 대상으로부터 사랑하는 감정 에너지인 리비도의 철회가 정상적인 것으로 된 것이다. 대상에 감정 투자가 저항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리비도는 다른 대상으로 발달이 바뀐 것이 아니고 ego 안으로 철수를 해 버린 것이었다.

 대상으로부터 철회된 사랑하는 감정 투자는 ego의 일부가 그 버림받은 대상을 동일시를 형성한 것이다. 고로 대상의 그림자가 ego의 일부에 떨어진 것이다. 후자는 또 다른 ego의 일부라는 특수 기관에 의해서 판단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대상인 것처럼 판단되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상 상실은 ego의 상실로 형태가 바뀐 것이다. 자신감의 감소를 가져온 것이다. ego와 사랑하는 대상 사이에 갈등은 형태가 바뀌어서 ego 안에서의 일부에 중요한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 관계로 변화된 ego의 다른 부분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형태로 변화가 온 것이다. 이 부분이 프로이드가 ego의 쪼개진 부분들 사이에 관계의 입장에서 무의식적인 내면 대상관계에 대한 입장을 쓴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자인 오가덴(Ogden, 2005)은 말하고 있다.

 

멜랑꼴리아와 조증과의 관계는 다음 장에서 계속됩니다